버마의 위안부
1942년 5월 일본군이 버마 전역을 점령하였고 일본군의 이동에 따라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의 동원이 이루어졌다. 중국·조선과 달리 일본의 영향이 전혀 없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위안소도 완전히 새로 만들고 위안부도 대규모로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위안부로는 일본인 여성이 동원되기도 하였으나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을 더 많이 동원하였다. 특히 그 중 조선인 위안부가 약 68%에 달한다는 연구보고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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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문서 [심리전 심문회보 제2호](1944.8.10.)와 [전시정보국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49호](1944.10.1.)에 따르면 조선인 위안부들의 동원은 손쉬운 일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거둘 수 있고 신천지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생활 등 희망찬 전망을 내세운
일본인 업자들의 사기
에 의해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약 700-800명의 조선인 여성을 태운 배가 1942년 8월경 일본인 업자들과 함께 랑군에 도착했다는 내용 또한 남아있다.
버마 위안소
미군 공문서에 따르면 ‘일본군이 상당수 주둔한 곳이면 어디에나 위안소가 군 당국의 재가를 받아 엄격한 규정 하에 설치되었다'고 적혀있어,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버마 위안소는 일본군의 이동에 따라 거의 모든 주요도시에 설치되었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순 없지만, 그 수는 대략 60곳에 이른다. 기존의 위안소가 한 위안소에 여러 출신의 여성을 배치하고 출신 지역에 따라 요금을 차등 부과하는 제도를 취하고 있었다면, 버마 위안소는 여성의 출신지에 따라 조선인 위안소, 일본인 위안소, 버마인 위안소 등으로 운영되었다.
이것은 위안부의 동원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여성을 동원한 업자들이 군대를 따라다니며 위안소 경영까지 하는 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에 한 업자가 자신이 데려온 지역의 여성들만을 관리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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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군 공문서[ATIS 연구보고서 120호: 일본군의 위락시설](1945.11.15.)에 따르면 연합군은 위안소를 일본군의 주요 위락시설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 해당 보고서의 결론을 보면 일본군이 상당수 주둔한 곳이면 어디에나 위안소가 군 당국의 재가를 받아 엄격한 규정 하에 설치되었다고 적혀있다.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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