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소는 1932년 중국 상하이에 해군 위안소로 처음 설립되었다. 그 후 중국 내 위안소가 조금씩 설립되다가 1937년에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많은 곳에 위안소가 세워졌다. 위안소는 일본군의 정책에 따라 중국 각지를 비롯하여 일본이 전쟁을 벌이는 동남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위안소의 전체 개수는 공식 통계에 차이가 있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193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점령한 대부분의 지역에 위안소가 있었기 때문에 약 200~400개로 추정한다. 위안소의 형태는 군이 직접 설치한 곳, 군이 설치하고 민간에서 경영하는 곳, 민간이 설치하고 군이 허가·감독·관리하는 곳, 전장의 상황에 따라서 임시로 운용되는 곳 등이 있었다. ‘위안소’의 명칭은 ‘삐집’, ‘WC’, ‘유곽’, ‘퐁퐁하우스’ 등 다양하게 불리었다.
‘삐’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WC는 공동변소(화장실)라는 뜻이다. 공식 위안소 이전에 유곽이었던 곳도 있어서 이 명칭도 남았다. 이를 통해 위안소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 군인들의 강간과 군기 문란 방지 1932년에 일본 육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寧次)는 일본 군인에 의해 강간 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막기 위해 위안소를 세웠다고 하였다.
2. 성병 문제 점령지나 전투지에서 성병이 발생하면 군 전투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전쟁에서 위안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성적으로 착취하였다. 위안소에 있던 여성들은 성적 착취 외에도 군인들이 벌이는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출처 : 『侵华日军罪行图录:90位幸存慰安妇实录』, 李晓方, 2016
출처 : 『侵华日军罪行图录:90位幸存慰安妇实录』, 李晓方, 2016